암묵지라…

[도대체가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은 명확하게 표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거론될 수가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하는 것이다.] 또는, [철학이란 말할 수 있는 것을 명확하게 서술함에 의해서 서술 못하는 것을 의미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두가지 명제는 엘.비트겐츄타인의 ([논리철학논고] 1921)에서 잘 알려진 말이다. 그 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철저한 논리주의에 의한 언어적 명시화에의 의지이지만 결과 로서 간접적으로 논할 수 없는 것, 말로 안 되는 것등을 부상시킨 점이 여타 논리주의자와 다른 점이다.

이와같은 비트겐츄타인의 말과 대비할 때 문제의 중요성이 더 확실한 것은 엠.포란니 ([암묵지의 차원]1966)의 다음 말이다.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말이 흥미스런 것은 알 수 있는 것 또는 ‘지의 가능성을 말할 수 있는 것 = 언어에 의한 명시화’의 한계를 넘어서 확실히 인정라고 있는 점이다. 또 그것이 물리화학상에 빛난 업적을 갖고 있는 과학철학자에 의해서 발언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 했으니 그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제시하고 근거를 마련해 주어야 할 것이다.

엠.포란니에 의해서 암묵지(Tacit knowing)라 불린 이 지의 소재는 현재, (페턴인식), (공통감각)의 지,(임상의 )등에 관련하면서 커다란 풍파를 이르키고 있다.

그럼 (암묵지)란 어떠한 내용을 갖고 있나 그가 제시하고 있는 예에 의하면, 우리가 어떤 사람의 얼굴을 알고 있다고 치자. 이 뜻은 다른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얼굴과 구별해서 그것을 인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 얼굴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를 해서 어떻게 인지하는 가를 말로 하지를 못한다. 사진에 의한 범인의 얼굴의 몽따즈와 같은 방법은 있지만 그 경우에 있어서도 범인의 인상을 동정하기 위해서는 말할 수 있는 일 이상의 것을 우리가 알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같은 맥락에서의 지의 소재는 사람얼굴에서 그 사람의 기분을 인지할 때, 또는, 병의 증후, 암석의 표본, 동식물의 식별 등에 대해서도 말 할 수 있다.

지의 소재방법은 게슈탈트 심리학의 생각과 일맥 상통한 것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특히 경험의 능동적 형성 또는 통합에 중점이 주어진다. 과학상의 발견, 예술상의 창조, 명의의 진단기술등 기예적 능력은 모두, 이 암묵지에 따르고 있다. 이러한 사정으로, 암묵지에서는 대상의 전체와 부분과의 관계가 큰 뜻을 갖지만, 그 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신이찌로.구리모또 씨([부다페스트 이야기]1982)도 강조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 지에 있어서 우리들의 신체가 관여하고, 또 그곳에 입주(dwelling in)상태가 된다는 일이 일어 날 수 있다는 것이다. 먼저 신체의 관여에 관해서는 포란니-는, [지적이건 신천적이건, 외계에 관한 우리들의 지식을 위해서 그 궁극적인 징치는 우리들의 육체이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입주상태”란 무엇인가 하면 여러부분으로 구성된 사물의 전체적인 의미를 이해하려할 때 제부분을 외부에서 보는 것이 아니고 그 전체 속에 입주해서 내부에서 본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때, 제반부분이 우리의 신체 속에서 통합된다. 우리의 신체가 제부분을 내면화한다는 것은 다시말해 전체 속에 신체적으로 입주한다는 뜻이다.

이와같이 하여 암묵지의 입장에 설 때 끝없이 명석한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복잡한 대상을 이해하려 할 떼 방해가 된다는 것이 이해된다. [하나하나의 세부가 더 확실하게 捕促이 되니까, 그들을 앎으로서 사물전체에 관해서 진의 관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 못된 신앙이다]. 이와같은 암묵지의 사고는, 모든 지식의 불가결한 부분을 이루고 있고 과학적 발견도 또한 그곳으로 유도되는 것이다.

확실히 우리는, 미지의 사항에 대해서는 명시적인 지식이 전혀 없으니까, 과학적진리에 대한 어떠한 명시적인 정당화도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문제의 소재를 알 수 있기 때문에, 또 한 그것이 숨어있는 무엇인가를 지시하고 있다는 것이 감지되기 때문에 과학적발견에 숨은 내용에 대해서 감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M.포란니의 (암묵지)는, 전언어적인 지가 갖는 가능성과 적극적 의미도 종횡으로 고찰한 것으로 해서 주목할만 하다. 그리고 그것은 비언어적이고 현시적인 지각을 포함한 것으로 해서 주목할만 하다. 그리고 그것은 비언어적이고 현시적인 지각을 포함한 것으로해서 {페턴인식}이라 불리운 것과 관련하게 된다. 그런데 그 페턴인식에 관해서 재미나는 것은 한 철학자가 “모든 것은 다 페턴 인식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점이다.

즉 페턴이란 넓은 의미에 있어서의 ‘형’을 뜻하며 페턴인식 즉 페턴을 인식한다는 것은 모든 사고의 공통기반에 있다. 가장 기본적인 마음의 움즉임이다. 예를 들어 ‘이것은 고양이이다’하는 가장 간단한 판단으로부터 ‘지상에서 던진 물체는 방물선을 그린다’하는 물리적인 정리까지 모든 각각의 물건을 유형에 맞춰 본다는 것 즉 페턴을 인식한다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대 희랍 철학자들은, 페턴이란 말은 쓰지 않았지만, 이미 그것을 철학의 중심과제로 채택하고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도 알리스토텔레스의 질료에 관한 형상도 이 문제에 관한 회답이였다. 또 중세의 실염론과 유명론의 보편론쟁(보편은 실제 있는 것인가 노미날한 것인가에 관한 논쟁)도 페턴인식의 본질에 관한 논쟁이었다. 또 근대철학가 중에서는 특히 흐윰이, 일반계넘을 귀납 즉 연상으로 이룩된 것이라고 한 것이 이것과 이어진다.

여기에서 흥미가 있는 것은 R.겔윅([마리클.폴라니의 세계 ]1977)이 고대 희랍이래의 철학사속에서 암묵지의 차원을 용인하고 있는 것은 같은 플라톤, 알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흐윰이였다고 말하고 있는 점이다. 폴란니 자신도 말하고 있는 것 같이 “지각은 가장 빈약한 형태의 암묵지에 불과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니까. 이 일치는 하나의 척도를 보여주는것에 불과할 것인가?

(페턴인식)보다도 실질적으로 ‘암묵지’와 깊이 관련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칠자가 말하는 ‘공통감각’의 지일 것이다. 공통감각 그 자체의 더 자세한 내용은 ‘common sense’항에서 취급하기로 하고 이곳에서는 우선 그것이 ‘채성감각(촉각과 운동감각)을 기체으로 한 오감의 통합이며 상상력과 같은 레벨의 전계념적인 지를 담당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에 그치겠다. 또 공통감각의 작용에 의해서 사물과 세계가 포착될 때, 거기에서 중요한 뜻을 갖는것은, 심볼리즘(싱징표현)과 코스몰로지(우주론)과 퍼포우먼스(신체행위)인 데, 그들의 제요소는, 의학적 임상이나 인류학적 휠드웍로서 특히 중요성을 갖기 때문에 그러한 지는, (임상의 지)(구치적으로는 별항 [임사의 지] 참조)라고 불리운다. (암묵지)는 [임상의 지]에 있어서 더 잘 체현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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